저녁 예배 마치고 교인들이 다 떠나고 나니 예배당 안이 휑 했다. 오늘도 나 혼자서 예수님이랑 뒤풀이를 해야 될 성싶었다. 그래 일찍이 다른 별에서 나의 연인이었을 이네싸 갈란테를 불러냈다. 그녀의 음반을 올려놓고 내가 즐겨듣는 카치니의 '아베마리아'까지 듣고 나서야 예배당 문을 닫을 수 있었다.
밤바람이 무척 차가워졌다. 가을도 저물고 있으니 곧 첫눈이 싸륵싸륵 내릴 것이다. 하늘에 별이 뜨지 않는 날은 첫눈이 어서 내리게 해 달라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아보기도 한다.
마침 오늘도 그랬다. 낮부터 어두운 하늘에 대고 첫눈을 졸랐다. 첫눈이 내리는 반가운 그 날은, 내 비나리가 한 몫 했다는 것을 그대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바람이 나들지 않게 아궁이를 철판으로 막고 방에 들어왔는데 기타가 넘어져 있고 줄도 하나 끊겨 있었다. 잘못 세워둔 내 탓이다. 저물녘 꺼내어 혼자서 노래를 불렀었는데, 아무렇게나 세워두고 나간 게 실수였다.
아팠겠구나, 여분으로 사 둔 기타줄도 없는데, 내일 줄 사서 이어주마. 미안, 미안.
내가 오늘 무슨 노래들을 불렀더라? 등을 보이고 떠나간 옛사랑처럼, 등을 돌려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불서러워 슬픈 노래만 찾아 불렀겠지.
오늘 청승도 '직녀에게'를 부르고서야 마칠 수 있었다. 다른 노래들은 악보에 끙끙거리며 부르지만 '직녀에게'는 눈을 다 감고도 기타 코드가 훤하고 또 나의 오매불망 애창곡이 아니던가. 흙벽에 기대어 그렇게 기타줄을 퉁기면서 연기처럼 무엿무엿 날아가는 내 목소리에 눈물겨워 했다. 앙잘스럽게 불러대는 '직녀에게'에 풀벌레도 우는 것만 같고 바람도 따라서 흐느끼는 것만 같았다.
'직녀에게'는 남녘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부르는 입당송이다. 강진과 광주에서 하늘날마다 통일을 염원하며 '직녀에게'를 부른다는 것은, 1995년부터 지금까지 한 주일도 거른 일 없이 부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장하고 대견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비단 남녘 북녘의 통일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평화와 일치, 천지만유 모든 생명의 합일과 조화로운 상생을 빌며 우리는 '직녀에게'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다.
'직녀에게'는 마을 사람들과 나를 친밀하게 연결해준 고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마을 저 마을 젊은 벗님네들과 버물려 지내다보니 자기들 계모임이든 뭣이든 상관없이 모임이 있으면 허물없이 나를 부르곤 한다. 전에는 항시 새하얀 동정이 달린 생활한복 차림을 한 기생오라비 같은 젊은이라고, 그것도 교회에서 성미 받아먹는 예수쟁이라고 싸늘한 시선을 안겨오던 분들이 하나둘 가슴 벽을 허물고 거두어 주신 것은, 이야기가 다 끝나고 뒷풀이를 하는 자리마다 내가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부르는 노래 '직녀에게' 때문이었다. 문병란 시인의 시, 박문옥의 가락, 김원중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노래 '직녀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한다……
분단의 죄책을 고백하고 나아가서는 헤어져 다른 길을 가는 길벗님들을 한데 불러모으는데 이 노래는 신령한 무엇이 되어 주었다.
더구나 남녘교회를 강진과 광주 두 곳에 세운 날이 모두 칠월칠석이 아닌가. 교우들과 함께 일부러 그렇게 날을 잡아 설립기념일을 맞추었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듯 남녘과 북녘이 하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 일에 작은 밑거름이 되겠다며 다짐하고서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남녘교회는 예배 때마다 '직녀에게'를 부르는 교회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나를 만나는 분들이나 강연을 부탁한 자리마다 '직녀에게'를 한번 불러보라고들 청한다. 내가 아는 노래가 이것뿐이기도 하기에 정 부탁들을 하면 안면몰수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이별이 너무 길다…"만 꺼내도 눈시울을 붉히는 님들을 보고는 한다.
놀라운 일은 대봉이 형이, 세상에 뽕짝말고 다른 노래는 죽어도 부를 것 같지 않던 그이가 '직녀에게'를,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말끔하게 부르는 것이었다. 뽕짝의 대가 김대봉이가 글쎄 '직녀에게'를 배우고 불렀다는 사실은 중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왜냐면 그는 뽕짝말고는 다른 풍의 노래는 노래로도 인정치 않는, 아예 취급조차 않는 뽕작 애호가, 매니아, 골수 뽕짝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쁜 농번기 철에도 대봉씨는 날을 잡아 한나절쯤은 낚시를 즐기는 멋쟁이다. 그러고도 충분히 나락을 거두어 말리는, 그이의 삶을 대하는 여유 앞에 나는 감동, 감동이었다. 농부들이 뼈빠지게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농부들이라고 저녁놀이 아름다운지 왜 모르겠는가. 쑥부쟁이, 구절초가 피어오르면 예쁘구나 매만지고, 바람결에 하들거리는 들판의 나락을 보면서 '워매, 아름다운그!' 감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시인'은, 역시 농부뿐이리라. 또한 술안주나 반찬 걱정으로 하는 농부의 낚시나 투망질은 백수들의 낚시질과는 그 격이 다른 것이다.
그 날도 몇 가지 잡지에 보낼 글이 있는데, 숨이 막히고 답답한 것이 도통 좋은 글이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마침 대봉씨의 전화를 받았다. 당장 송학리 앞바다로 낚시를 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바다구경이나 하면 생각이 영글 것 같아 따라나섰다. 대봉씨는 낚싯줄을 던져놓고 시종 흥얼거리더니 난데없이 나보고 당겨 앉으라 그랬다.
"동상이 좋아하는 것이라믄 나도 다 좋아혀불고 잪은 맴이 들어가꼬 말여, 쪼깨 흉내를 내볼라고 거 네신가 다섯신가 라디오에서 하는 클라식 시간 있잖응가? 그것을 한번 들어보았거당? 그란디 워찌게나 잠이 쏟아져 불든지 거 혼나 부렀네. 그래가꼬 '직녀에게'는 으짤까 해서 전번 날 김원중이 테이푸를 사설랑은 자꼬 들음시롱 익혔드니만 말이시, 인자는 이상 잘 부른당게? 가사 한번 듸게 슬퍼 불드라고이. 꼭 내 맴만 같고 말이시. 말이 나왔응게 한번 들어나 보실랑가?" 그러더니만 '직녀에게'를 냅다 뽑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대봉씨를 바라봤다. 노래꼬리가 비틀어지는 뽕짝 풍이라서 다소 아쉬웠으나(?), 내 평생 그렇게 굉장한 '직녀에게'는 처음 들어보았다. 대봉씨가 눈을 살짝이 감고서 부른 '직녀에게'는 나도 모르게 뜨건 눈물이 괴여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별의 가슴 뜯는 아픔을, 그리고 재회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몸까지 뒤틀어가며 노래에 실어 날리는 대봉 씨.
저승으로 먼저 간 아내를 생각하며 부르는 듯한 대봉씨의 '직녀에게'는 분명 예사로운 노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노래를 다 듣고 눈물을 닦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소매를 가득 적신 눈물을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