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기름 뿔에, 사울은 기름병에 담아 부은 이유
사무엘상을 읽다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사무엘상 10장 1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병(甁)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사무엘상 16장 1절과 13절에는 다윗에게 기름 뿔에 기름을 채워서 부으라는 명령을 받아 그대로 실행했다.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린다.
병과 뿔은 서로 차이가 있는 용기로서 병은 작은 실수로 떨어뜨려도 깨어져 버린다. 그러나 뿔은 차 밑에 넣고 달려도 끄떡없이 깨어지지 않는 용기다. 이미 기름을 담는 용기로서 사울의 존재와 다윗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어쩌면 사울 왕은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며 다윗은 깨어지지 않는 존재로 부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무엘상 16장 1절을 다시 한 번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는 말씀에 따라 기름을 부었다.
어느 목회자는 용기에서 그런 차이를 느낄 필요가 있느냐? 너무나 알레고리한 해석이 아니냐? 는 등 질문을 해단다. 그렇다. 차이를 두지 않고 그냥 대충 과거 역사적인 왕들이 인준을 받는 과정에서 용기나 그릇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발견해 낸 것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병과 뿔이 단순히 사물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그릇’이 바로 ‘사람’인 ‘우리’를 뜻한다면 말씀 속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로마서 9:24에 “이 그릇은 우리”라는 대목이 있다. 21~23에 보면 귀히 쓸 그릇이 있으며 천히 쓸 그릇이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을 보이시고자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신 뜻을 사도 바울은 밝히고 있다. 베드로전서 3:7에는 남편은 아내와 동거하기 위해 더 연약한 그릇을 여기라고 했다.
이와 같이 사람을 그릇을 여기며 대칭시키는 말씀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 성도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마땅하다. 디모데후서 2:21~22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되어지는 그릇이 되라고 흔히 임직식에서도 임직 받는 분들에게 권면이나 축사를 할 때 강조하는 내용을 듣게 된다.
이사야 30:14에 나라를 그릇으로 의미하는 대목도 있다. 또한 말씀 속에 여러 가지 다양하게 그릇의 본질과 개념을 부각시키려는 말씀의 목적을 올바르게 찾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호 8:8) 예레미야 18장 토기장이의 비유를 본다면 더욱 더 확실한 내용을 부연 설명으로 강조하고 있다.
분명하게 한글 성경으로도 제시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해석이다. 아니면 이상한 설명이라고 못 박아버리는 성격은 그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인지....... 이렇게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는 문자적인 그릇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있겠지만 그 뒤에 숨은 뜻을 발견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마지막 공궤를 마친 뒤 엘리야가 과부에게 집 안에 있는 그릇을 가져오라고 한 것을 단순히 그릇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집안의 식구 가족을 의미하며 동네에 나가서 그릇을 빌려오는 차원도 동네 사람들을 불러와 그릇인 사람들 속에다 기름과 밀가루를 채우는 것은 메시아(마사이 기름 부은 존재)와 한 알의 밀인(그리스도 예수)를 채우겠다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을 들어 부흥사들이 목회자들은 육적인 것으로 주의 종에게 대접을 잘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너무나 한심한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 문자적인 내용에서도 얼마든지 귀중한 뜻을 말하려고 할 수 있으며 드라마틱한 의미를 전달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단면적인 내용만 있는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성경은 마치 퍼즐을 쏟아진 채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퍼즐을 맞춰 나가듯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말씀의 원형과 뿌리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사야 34:15에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에서 성경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며 서로 짝을 찾는 분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대목은 11~15까지 열거하는 각종 짐승들의 짝들을 의미하는 말씀인데 성경구절들의 짝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읽고 올바르게 깨달았으면 하는 염원 속에 말씀의 근본적인 개념과 본질을 찾아나서야 하겠다. 또한 단어뿐만 아니라 구문 그리고 문장. 심지어 아주 단순한 전치사까지도 숨어 있는 내용의 귀중하고 신비로움을 찾지 못한다면 말씀의 비밀을 찾는 희열을 어찌 설명할 것이며 감동적인 순간을 맛볼 수 있겠는가?
한글도 되어 있는 내용만이라도 제대로 의미와 본질을 발견한다면 나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장하심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을 스스로 찢어(깨어) 버리는 사울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찢지 않으며 증명하기 위해 생명의 근원과 뿌리를 계속 나타내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바로 부활이요, 천국이며, 영생인 것을 자랑했으면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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