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녀석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녀석은 바로 자식 놈이라고 했습니다, 낳아주고 먹여주고 키워주고 주고 또 주어도, 끝이 없이 손 벌리고 입 벌리는 게 자식이요, 그나마 고마운걸 알면 요행(僥倖)이요, 욕 안 먹으면 다행(多幸)인 게 자식 놈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릴 땐 매사 미숙하여 하나에서 열까지 다 돌보아 주어야 하고, 조금 큰 다음엔 청개구리마냥 제멋대로 행해 부모 가슴 태우고, 부모 앞에 평생 철부지가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부모는 이러한 자식이 삶의 보람이요 기쁨이기, 어떤 경우라도 항상 참고 기다리면서 자식의 행복을 염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은 인간의 자식 사랑하는 모습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이 애자지정(愛子之情)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알게 하시고 보여주십니다, (사46;3~4)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하시는 바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 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롬 8;14~17) 라 하십니다,
성경에서 이런 뻔뻔한 자식의 대표적인 이야기는 누가복음15장 11절 이하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이야기를 보면서 아들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세상 제일 뻔뻔한 녀석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뻐 용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이 돌아온 탕자를 “죽었다 다시 살아난 자, 잃었다 다시 얻은 자”로 표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죄로 인해 죽은 우리의 회복을 염원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제 발로 돌아온 가출한 탕자를 반기는 부모의 마음으로 잘 나타나있는 이야기입니다,
남 같으면 맞아죽고도 남을 이런 자식의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부모님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자식인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부모에 대한 확신에 기초합니다, (사43;1~2)
4층 연립주택에 불이 났습니다, 혼자 집에서 놀다 연기를 피해 3층 난간에 매달린 3살 꼬마를 보며 모두 발만 동동 구릅니다, 구조 메트리스를 깔고 소방수들과 동네사람들이 뛰어 내리라고 아무리 소리쳐보지만 겁에 질린 아이의 귀엔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 라고 하자, 팔을 벌리고 선 그를 한번 쳐다본 아이는 주저 없이 손을 놓고 뛰어 내립니다, 그 사람은 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부모에 대한 신뢰는 뻔뻔함만 아니라 이런 담대함, 도발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담대함이 있으니, 곧 나의 뒷감당은 아버지 하나님이 다 해주실 거란 무대포에는 약(藥)도 없습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를 외치며 새총 하나들고 골리앗에게 나아가는 소년 다윗처럼(삼상17;45),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를 외치며 풀무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다니엘의 친구들처럼(단 3;18),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노라고 매달리는 사기꾼 야곱처럼(창 32;26),
그러나 이 철부지 같은 뻔뻔한 무대포가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랑이 된다면 대포 없이 전쟁터에 나간들 겁날게 뭐 있겠습니까, 이렇듯 부모를 온전히 신뢰하는 아이처럼 이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랍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모처럼 보살펴주는 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모 없는 자식들의 처지는 어떨까? 세상을 향해 타인을 향해 뻔뻔하게 물색없이 굴다가는 맞아죽기 십상입니다, 어쩌다 운이 좋아 양자로 입양되는 행운을 제외하고, 부모를 잃고 헤매는 아이들의 태반은 악(惡)한 자들의 먹이감일 뿐, 그들을 향한 세상의 손길은 냉정합니다,
소위 앵벌이 두목은 부모 잃고 헤매는 이 유기된 아이들을 모아, 오직 자기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훔치고 빼앗고 속이는 것들을 가르쳐,종으로 부릴 뿐, 그들의 복지와 행복과 생명에는 관심이 없기에 진정한 사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이용하고 결국엔 유기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마귀에게 붙잡힌 하나님을 모르는 자, 부인하는 자, 대적하는 자들 중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끊어진 자들은(갈 5;4) 영적으로 부모 잃은 자식과 같습니다, 이 버려진 자식들의 인생과 삶의 무의식적 근저에는, 유기된 존재로의 좌절감과, 소망없는 막장인생이 주는 절망감과,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소외감이 깔려있습니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주지 못한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19) 이 인생들의 종착지는 “너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진저”라는 문패가 걸린 지옥입니다,
그러나 이 버려진 자식들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산만큼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같이 입에 젖병물고 혀 짧은 소리해대며 철딱서니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고 상상을 해보면 믿는 자의 영적지체 역시 문제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 4;13~15) 신앙도 때가 차면 성장 성숙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답니다,
육체적 성장을 위해 식물(食物)이 필요하듯, 이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3 이하), 바로 이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매일의 삶속에 영적인 성장과 성숙의 동력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구하기 전 먼저 식욕을 주시는 하나님은“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하십니다, 또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8;32)하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결코 버리지도 않겠다는 하십니다, (사1;2~6)
이 신실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진정 인정한다면, 그분 앞에선 나의 뻔뻔함의 근거는 성숙된 믿음밖에는 내세울게 없습니다,그렇다면 믿는 자가 성경을 읽지 않는 것, 말씀을 묵상하여 삶의 질을 높이지 않는 것, 분초마다 간섭하시는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 것과 주님의 몸 된 지체로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지 않는 것,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 인도 공급하심에 감사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삶의 현장에 드러나는 말씀과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
만약 믿는 나에게 이런 뻔뻔함이 있다면, 단지 교회 다닌다는 이유 말고 나는 무얼 믿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뻔뻔한 것인지를 반문해 봅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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