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가 그치자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의 그 날이, 오늘이었다. 장흥 천관산을 넘어온 태양은 강진 탐진 들판을 다사롭게 달구며 봄의 중턱에서 여름의 저만치로 나날이 길을 서두르고 있다.
올 여름에도 선욱이 지훈이 남준이가 불알을 짤랑거리며 물넘이에서 멱을 감을까? 녀석들이 올해는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멱을 감지 않으면 어쩐다지? 그렇다면 물넘이에서 멱을 감을만한 아이들이라곤 없는데 말이다. 당당 먼 여름 일을 벌써 끄당겨와 별 해괴한 걱정을 다한다 하시겠다. 이러니까 내가 비쩍 마르고 살이 안 찌는가 보다.
아침 일곱시 정각, 어김없이 마을방송은 시작되었다. 요즘 이장님이 주로 틀어대는 송대관의 네 박잔가 다섯 박잔가 하는 노래가 아침의 고요를 와창창하고 깨트린다. 마을 방송을 알리는 나팔수 노릇을 한동안 새마을운동 주제가가 하다가 지금은 뽕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 시간을 송대관, 태진아며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핸가 뭐신가 하는 망측한 가사의 노래까지 필히 기십여분을 들어야 한다면, 그대는 어떻겠는가. 살고 싶겠는가, 죽고 싶겠는가?
처음 이사와 몇 달 동안은 너무 견디기 괴로워 베개로 머리를 누르고 그 위에 이불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턴가 '오냐 그래 틀어라'로 마음 정리가 되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그 끈덕짐에 두손 들어버린 것이다.
노래가 몇 곡 끝나면, 이장님은 잠자는 아이를 깨우는 심술궂은 아버지처럼 클클 가래기침을 개어내시며 "하나 둘. 마이크를 시험합니다요. 하나 둘. 잘 들리싱게라우?" 그리고는 쇳소리가 나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본론을 꺼내기 시작한다.
오늘 방송은 근 일주일을 징상스럽던 온천 관광건의 대미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관광 버스가 여덟시까지 마을 앞에 당도하니 가기로 약정금을 낸 분들은 서두르란다. 농사가 한창일 때 이런 일은 꿈도 못 꾼다. 마침 나들이하기에 좋은 시기가 이맘때 아니겠나.
관광버스가 마을로 내려가는 걸 예배당 변소에서 나오다 보았다. 지지리도 운이 없는 관광버스로구나 싶었다. 우리 동네 아짐들 같이 버스춤을 목숨 바쳐 추는 이들도 드물 것이기에 말이다. 아저씨들은 가만히 앉아 구경이나 해야지 일어나 춤이라도 한번 땡기려 했다가는 아짐들 엉덩이에 천금같이 아끼는 허리뼈 나가기에 딱 좋다. 그 큰 방뎅이에 한번 받혔다가는 뒤로 나자빠지지 않을 장정이 어디 있겠는가. 가고 오고 하는 내내 버스춤을 추어댈 터인데, 저 버스가 그 하중을 어찌 다 견딜지……. 여하간 탈 없이 잘 다녀오세요, 즐거운 여정을 빌어드렸다.
마을에 남은 사람이라곤 나처럼 재미하고는 담쌓은 인간들이나 먼 행보가 어려운 연로하신 분들, 혹은 집에 돈 되는 물건이 있어 도저히 불안하여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부자일 뿐이리라.
마음 같아선 나도 관광버스에 올라 같이 노래도 부르고 흔들어 대고도 싶은데, 이놈의 목사 체면이 어디 그런가. 예수님이라면 분명히 오늘 그 버스에 올라탔을 것이다. 그리고 온천에 맨 먼저 발가벗고 뛰어들어 찌뿌듯한 삭신을 녹이고 낮술에 발그레 취해서 버스춤의 진수를 본때로 보여 주셨을 텐데…….
개집 앞에 앉아 별똥별이랑 놀던 해빈이가 그도 싫증이 나는지 자전거를 태워 달랬다. 아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마을로 내려갔는데 을덕 씨가 구판장 앞 공중전화통에 오그려 앉아 담배를 뻑뻑 빨아대고 있었다.
사람의 종류에, 내놓은 사람과 내놓을 만한 사람이 있다던데, 을덕 씨는 일찍이 내놓은 사람으로 이 동네 대명사가 된 사람이다. 수전증까지 보이는 알코올 중독인데다 성질머리도 뭣 같아서 피식하면 애들 마냥 쌈박질이었다. 학명 마을에 제집인 함석집이 있긴 하지만, 태생이 이곳이라 안골에 주로 내려와 옛 어머니 살던 빈집에 거하는 날이 많다.
"저만 떨쿼놓고 가부렇다고 인데까정 저라고 앉어 있다요."
구판장에 마실 나온 북일댁 할머니가 살짝이 귀뜸을 해 주셨다. 돈 안 내고 그냥 한번 얹혀서 가볼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다른 사람 같았으면 가엾은 마음에 각출을 해서라도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을덕 씨가 누군가. 이틀이 멀다하고 술 주정이 가관인 개망나니가 아닌가.
웨하스 하나를 사들고 나오는 길에 을덕 씨를 일으켜 세웠다.
"조반 안 드셨재라우? 교회로 갑시다."
전 같으면 됐다고 뒷걸음 칠 그가 언짢은 마음을 위로 받고 싶은지 해빈이를 무동 태우고서 내 자전거를 따라왔다.
집에 당도하자마자 춘향가 중 '갈까부다'를 찾아 틀었다. 염장을 지르는 노래일 수 있겠지만, 오늘 을덕 씨의 배경음악으로 적격이라 싶었다.
식사를 다 마친 을덕 씨에게 "같이 못 가서 서운하신가본디 화는 쪼께 풀리셨어라?" 물었더니 "지가 무담씨 이란다요? 웽간하믄 넘어갈락 캤는디 인자 더는 못참겄구만이라우. 작것들이 지를 무시하기를 맴생이 똥만도 못허게 여긴당게요." 거머쥔 주먹을 푸르르 떨며 그랬다.
배도 부르고 하여 그 길로 집에 돌아간 줄 알았는데 읍내 나가는 길에 보니 교회 앞길 버스 승강장 속에 웅크려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 잘 일이지 왜 저렇게 노상에서 자는 걸 좋아할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읍에 다녀오며 다시 보니 여태도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누워있는 게 아닌가. '혹시 저 사람 지금 관광버스 기다리는 거 아냐?' 그렇다면, 그렇다면 큰일인데…….
저녁이 으슥해진 즈음, 텃골 들어가는 예배당 앞길에 버스가 멈춰 섰다. '앗싸라비아 으싸 으싸' 방정맞은 추임새가 들어간 노래 소리로 보아 아침에 떠난 관광버스였다.
나는 승강장에 누워 있던 을덕 씨 생각에 '왐마 큰일났네' 하면서 서둘러 나가보았다. 어디서 또 술을 먹고 나타나 이장님을 때려눕히던지 아니면 버스기사나 마을 분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버스에는 아직 양이 덜 찼나 섭섭한 아짐들이 몸을 흔들고 있었고 운전기사는 어서 내리라는 투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앉아있었다. 가만 보니 교인들도 몇 보였다. 나를 보고는 카바레에 들이닥친 카메라 출동을 만나기나 한 듯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잘 노시고 오셨어요? 얼굴이 화악들 피셔부렀네." 반겼더니 머리를 긁적이시며 달아나신다. 그러는 경황인데 멀찍이서 벼락 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재밌드냐? 재밌어 부렀어?"
얼게벌게하고 달려드는 을덕 씨 소리였다.
버스에서 서둘러 내린 잣골 진씨가 "을덕이. 어른들 계신디 이라믄 안되재." 감아 잡으면서 관광기념이라는 글씨가 선명한, 효자손 하나를 선물이라고 내밀었다.
"필요 없당게라."
을덕 씨는 사정없이 땅바닥에다 효자손을 팽개쳐 버렸다. 그걸 다시 주운 신정 양반이 향나무로 깎은 듯 보이는 밥주걱까지 하나 보태어 쥐어 주며 "을덕아이, 니가 없응게로 시상 재미 한테기 없드라이. 널 데꼬 가야썼는디 말여." 하시면서 을덕 씨를 추켜세웠다. 이장님은 "으짤 수 없었지 않응가. 자 이거 한잔 들라고." 술잔을 내밀었다. 을덕씨는 푸짐한 안주와 소주를 보더니만 눈에 세운 핏대를 허물고
"죙일 기다렸는디…"
못다 한 행패를 서운해하며 술잔을 받고는 "줄라믄 싹- 줘" 하면서 병째 빼앗은 것이었다.
동네 분들은 다 내려 집으로 흩어지고 관광버스는 허정허정 마을 밖으로 내뺐다. 술병을 꽤 차고 버무리떡 한 접시도 따로 챙긴 을덕 씨는 이 밤 어디로 갔을까. 종일 별렀다는 게 고작 이 정도라니,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깡탈이 날로 싱거워지는 그이가 안쓰럽다. 이장님은 마지막까지 남아 뒷정리를 하시다가 내일 아침 방송을 염두하고 그러시나 사이다 한잔으로 여러 번 목을 헹구셨다. 승강장에 앉아 달구경을 하던 나를 보시고는 한잔 건네신다. 토-옥 쏘는 사이다 맛이 꼭 이 마을에 사는 맛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