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진리/참꽃 피는 마을·임의진참수필집·이레

외등

꿈꾸는 섬 2010. 3. 22. 19:34

 

저녁밥상을 물리고 차도 한잔 우려서 마시고 나니 잠이 담뿍 눈 안에 차 올랐다. 그러나 밤도 길어졌는데 일찍 잠들었다가는 내일 하루가 노골노골 해질 듯 싶어 눈을 거푸 비벼댔다.
밖이 요란하길래 나가보니 어머니가 두리번을 앞에 놓고 야단을 치고 계셨다. 강아지가 신발 한 짝을 물어가서 당최 내놓지를 않는다며 어미 개를 불러서는 닦달을 놓고 계시는 중이었다. 급기야는
"니는 말이여, 애갱이(애기)를 도대체 으찌게 가르쳤으믄 허는 짓거리마다 고 모냥이다냐, 잉?" 말귀 알아먹는 사람에게 하듯이 꼭 그러시는 것이었다.
어미 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낑낑거리고 어머니는 으르렁거리고, 한참 그 실랑이를 허허거리며 엿보다가 "내가 찾아볼께요." 하고 손전등을 켜 들고 일어섰다.
강아지는 이미 어머니의 보랏빛 슬리퍼를 자근자근 씹어서는 무화과나무 너머에다 던져놓고 도망친 뒤였다. 이 '비보'를 전했다가는 개들 모녀가 오늘 밤 편한 잠은 다 자겠다 싶어 나는 그 길로 집을 벗어나 안골로 밤 마실을 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길가 외등이 어젯밤과 달리 새차비로 빛나고 있었다. 낮부터 그물거리던 하늘은 달빛 한줌도 부조하지 않았다. 전봇대에 내걸린 외등이 고마운 빛살을 내뿜지 않는다면 이룽이룽한 밤길을 어찌 더듬어 갈까 싶었다.
가을밤 길섶에서 만난 소리들은 갖가지로 얼러붙어 그윽한 모뽀리(합창)였다. 몰곳몰곳 서있는 나무들이 떠나려는 잎새들을 타이르는 소리, 귀뚜리 수컷이 짝을 찾아 뚜루 뚜루루 타전을 울리는 소리, 황소들이 영각을 켜면서 외롭다고 못살겠다고 땡강을 놓는 소리, 그리고 농사일로 노곤한 몸일지라도 당겨 앉아 쑤알쑤알 정담을 나누는 노부부의 얘깃 소리가 가을밤 구석구석을 오달지게 채우고 있었다.


동네 앞에 이르자 군내버스가 멈춰 섰다. 고작 여덟 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이 버스가 동네와 읍내를 잇는 마지막 막차다. 버스를 놓치면 택시를 타야 하고, 그러면 만만치 않은 돈을 치러야 하기에 막차는 항시 초만원이다.
잣골에 살며 병원에서 간호 조무사로 일하고 있는 연선이가 맨 끝으로 내렸다.
"아가씨가 이렇게 빨리 집에 돌아오니까 시집을 못 가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몰라서 물어? 택시 타고 자정쯤 다니던 얘들 봐. 다 시집 갔잖어."
"뭐 그게 시집 간 거래요? 잡혀 간 거지."
"하하, 그렇긴 해."
연선이는 작년 봄, 혈압으로 갑자기 세상을 뜬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고자 아버지 곁을 찾은 효녀다.
아버지는 한사코 인천서 사는 큰아들네와 합치려 들지 않았다. 육십 평생을 일군 논밭을 떠날 수 없었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고락을 함께 했던 아내의 무덤을 두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까닭일까. 진씨 아저씨는 혼자서, 농사 짓고 국 끓이고 밥 앉히고 빨래하고 하면서, 근 반년 가까이를 홀아비 신세로 처량했다.
인천 오빠 집서 살며 병원에 근무하던 막내딸 연선이가 큰 결심을 하고 아버지 곁으로 내려오길 망정이었지, 동네 사람들마다 안쓰러워 더는 못 보겠다던 진씨였다.
연선이는 용케도 내려오자마자 직장을 얻어 다행이었다. 시집갈 때까지 당분간이겠지만, 딸이랑 함께 살게된 진씨는 밖으로 외등을 새로 달고 안으로는 방을 뜯어 고쳤다. 진씨 아저씨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은 전에 외등이 없어 캄캄했던 골목이었다. 그런데 진씨가 자기 집에서 전선을 끌어다가 외등을, 그것도 두개씩이나 내달았다. 나라에서 달아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며 목숨처럼 아낄 전기였지만, 과년한 딸을 데리고 살게된 아버지로서는 그까짓 전기료 따위에 겁먹을 일이 아니었다.
전봇대 외등에서 멀어지자 나는 다시 손전등을 켜야 했다. 이왕 나온 산보인지라 연선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올 참이었다.
마을은 해만 떨어졌다 하면 캄캄한 오밤중이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작은 외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늦게 찾아올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등을 켜둘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연선이 집 앞 골목에 다다르자 대찮아 외등이 밝게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아버지 진씨가 오늘도 늦은 저녁밥을 해두고 기다리고 있으리라.
연선이는 "고맙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손을 흔들고 서둘러 들어갔다.


그래도 명절날이 되면 온 동네는 집집마다 밝힌 외등으로 들떠 오른다. 도시에 나가 사는 자식들의 귀향을 반기며 온 동네 외등이, 실로 오랜만에 켜지는 그 날. 나는 유심히 외등을 지켜보곤 한다. 명절날에도 평소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는 나는, 밤새도록 외등이 꺼지지 않은 집을 목격하곤 한다. 그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파 온다. 외등이 꺼지지 않은 집은 필경 아무도 오지 않은 집일 것이기 때문이다.
명절이라도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내 외등을 켜두는 할머니가 있기도 하다. 죽은 영감의 혼령이라도 기다리는 걸까? 일년 열 두 달 안부전화 몇 통 걸 줄 모르는 그 따위 자식이라도 간절히 기다리는 걸까?
그런 날 아침에 나는, 할머니를 찾아뵙고 잠시 잠깐이나마 아들이 되어 드리곤 한다.
저물녘이 되면 집집마다 외등이 켜지고
"엄니, 저희들 왔구만이라우"
"옴모메, 우리 애갱이들 왔능가이? 어여, 어여 들어와라잉." 하면서 비로소 외등이 꺼지는 집. 세상에 그런 집만 있다면 얼마나, 그 얼마나 좋겠는가.
멀리 보니 예배당 외등이 환하게 켜졌다. 어머니가 나를 걱정하며 켜둔 외등이다. 저 양반은 나를 아직도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로만 안다. 밤중에 집밖에라도 나갈라치면 걱정이 태산 같아지는 분이시다. 내가 사십 줄을 넘어 환갑 나이에 이른다 하더라도 변함 없이 어린애로 여길 분이시다. 허기사 그러기에 어머니 아니겠는가.
집 가까이 이르자 강아지가 깨갱깽 얻어터지는 소리로 난리였다. 어머니가 드디어 신발 사건의 전모를 알아채신 모양이었다. 에구구, 이 바보야! 꼭꼭 숨지 않구.

'문학과 진리 > 참꽃 피는 마을·임의진참수필집·이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수지 둑길  (0) 2010.03.26
직녀에게  (0) 2010.03.22
참지름 한 뱅  (0) 2010.03.22
사이다 맛  (0) 2010.03.22
요강에 꽃을   (0) 2010.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