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늘은 구름떼로 뒤덮여 열기가 많이 수그러든 여름날이다.
그래도 여름은 여름인지라 후텁지근하기는 매일반이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대자리에 누워 있는데 볕 마당 대신 방에다 널어둔 고추 때문에 재채기가 연발이었다.
빨간 고추들이 자꾸만 나를 밖으로 떠밀어냈다.
구멍가게에 들러 얼음 과자나 하나 깨물 셈으로 동네를 향해 발길을 내디뎠다. 그런데 아스팔트 도로가 신발 밑으로 느껴지는 순간 얼음 과자 생각이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차라리,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고 나는 어느새 저수지 둑길을 접어들고 있었다.
저수지 둑길에 서면 들녘에서 몰개쳐 오는 시원한 바람이 옷깃, 머리칼은 물론이고 무더위까지 날려보낸다.
그까짓 얼음 과자 따위에 비하랴.
나는 이 둑길을 걷는 일을 취미라면 취미요 낙이라면 낙으로 삼고 살아간다.
저수지에 찰랑거리는 물에 맨발을 담가보기도 하고, 풀대를 하나 하나 꺾어 물고 비릿한 풀 맛에 황홀해하기도 한다.
저수지 둑을 혼자서 거니노라면 급기야 시인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더욱이 저수지 둑길은 내 유년의 추억 한 켠에 소중한 추억으로 게어져 있는 곳이다.
그 길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기억 저편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타임머신을 탄 듯 그 길에 들어섬과 동시에 걸리버처럼 키가 줄어들고 피터팬처럼 동심의 날개가 돋아오른다.
거기서 나는 그리운 형의 손을 잡고 송아지와 겅중거리면서 둑길을 달음질치곤 한다.
나 보다 한 살 많았던 형은 다운증후군 장애인이었다.
형은 이제 저 하늘로 돌아간 사람이지만, 내게 있어 잊을 수 없는, 또한 지울 수 없는 사람이다.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형은 '병신, 멍충이, 버버리'로 통했다.
형 덕분에 우리 집 식구들은 '버버리집 아무개로'로 다짜고짜 불러졌다.
형이 태어났을 때 목사가 병신 자식을 보았다고 아예 교회를 떠난 교인들도 있었다 한다.
철없는 아이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잇살 먹은 어른들조차 뻔히 알고 있는 이름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버버리' 라고 쉬이 불러 댔다.
허기사 째보네, 곰보네, 꼽사네 하면서 마구 '몸꼴' 대로 불러 댔던 그 시절에는 말 못 하는 아이 하나 가리켜 버버리 라고 부르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버버리든 뭐든 불러 댔어도 우리 집에서만 큼은 형을 이름 그대로 다정히 불렀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온 식구들이 서럽게 울면서 이리저리 동네 구석구석, 온 들판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우리 집에서 만큼은 형은 병신도 ,멍충이도, 버버리도 아니었고 오직 사랑하는 식구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형은 날마다 초등학교에 찾아와 운동장에서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느그 성 왔다"
유리창 가까이 앉은 녀석이 무슨 보고를 올리듯이 꼬박꼬박 챙겼다.
그러면 나는 유리창 너머로 형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았고, 고무신을 벗어 흙 놀이를 하거나 시소에 올라가거나 하면서도 내가 있는 교실로 눈을 떼지 않는 형에게 간간이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이 감기라도 걸려 드러누운 날이면 운동장은 하냥 쓸쓸한 빈 구석이었다. 형 때문에 당하고 사는 고초를 생각하면 후련한 마음이 들어야 쓸 터인데 형제간 정이란게 참 괴이한, 알다가도 모를 무엇이었다.
둘이 재재거리며 돌아오던 신작로를 혼자서 걷노라면 마음 한 귀퉁이가 여간 허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며칠 후 다시 운동장에 형이 보이는 날이면 얼마나 마음이 새구럽게 환해지고 따뜻해 오던지......
그래 반가움에 가방을 미처 메지도 않고 뛰어나오는데 동네 덩치들이 가라는 집은 가지를 않고 '너 오랜만에 본다' 는 듯 형을 빙 둘러싸고 섰는 게 아닌가? 아니다 다를까 시누대 끝으로 푹푹 배를 찌르며 "병신 아! 모지리야!" 놀리고 이었다.
나는 책가방을 던져두고 녀석들에게 미친 듯이 대들었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집단으로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작살나게 두들겨 맞았고 바닥에 나뒹굴며 꺼이꺼이 서러운 울음만 뱉어냈다. 던져두고 간 "병신새끼들이 쑈를한다" 는 말이 가슴 밑바닥까지 후벼댔다. 우리 형제는 흙을 털고 일어나 소매로 코피를 닦고 집을 향해 걸었다.
그런 날은 미루나무가 늘어선 황토길이 그렇게 멀고 아득할 수 없었다.
하교길에 괴롭히는 아이들이 두려워진 형은 학교에 나타나는 일이 뜸해졌다. 대신 들판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송아지, 염소, 개떼, 들꽃, 나비,메뚜기, 개구리, 미꾸라지, 물총새......,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형은 이들로나마 친구를 삼고 외로움을 달래야 했다.
행여나 빠질까 가지 말라던 저수지 둑방이었지만 형은 막무가내였다.
바로 송아지 때문이었다. 형은 어미소 곁에 뛰노는 송아지 앞에 앉기만 하면 옴짝달싹 않고 삼매경이었다. 그러다가 항상 어둑해져서야 돌아왔고 어떤 날은 아예 송아지를 따라서 주인네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런 날은 아버지에게 된통 지청구를 얻어 들어야 했다.
하루는 왜 그렇게 형이 송아지를 좋아하는지 큰누나에게 물어 보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밤부터 날아왔다.
"얌마, 그걸 모르겠냐? 니가 성하고 안 놀아중께 쇠양치 같은 것을 동무 삼아가꼬 노는 거시재."
형에게 있어 나는 송아지만도 못한 존재라니, 형을 부끄러워하고 또 귀찮아 여겼던 날들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형을 찾아 나섰는데, 그날 따라 보이지를 않는 거였다.
동네 사장거리에도 없고 저수지 둑길에도 없고 미루나무 늘어선 들판에도 없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달려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는 온 식구들을 이끌고 나왔다. 아무리 찾아봐도 형도 없고 송아지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시구들은 난리가 났다. 밤은 솥뚜껑처럼 내려오는데. 세상은 온통 먹장이 되어 가는데.......,
송아지 주인네를 찾아갔다. 이미 송아지는 외양간에 들어가 있었고 형은 보이지를 않았다. 주인네 말에 따르면 오늘은 저수지 둑에다가 소를 매지 않고 공동묘지 근처에다 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그곳까지 형이 나타났고 집으로 가라고 암만 뭐라 그래도 말을 듣지 않더란다.
송아지 주인네가 손전등을 켜들고 앞장을 섰고 우리 식구들은 제발 그 자리에 있어주길 빌며 공동묘지 근처로 달려갔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형은 그 자리에 있었다. 온몸에 소똥이 범벅이 된 채, 으으으으 떨며 울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식구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형을 붙잡고 실성한 사람처럼 울었다. 식구들도 따라서 소리내어 울었다. 송아지 주인네도 눈물을 훔쳤다.
그날 이후로 송아지 주인네는 늘 저수지 둑방 둘레에다만 소를 맸다.
그 송아지는 어미소가 되었고 새끼를 낳아서도 늘 그 근처에 보였다.
나는 다시 저수지 둑길에서 송아지를 만나고 싶다. 이제는 저수지 둑방 뿐아니라 들판 어디에서도 소를 구경하기 어렵다. 아마도 인심이 사나워서 도둑 손을 탈 것이고, 소가 '일' 이 아닌 '돈'으로 값어치가 매겨지는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리라. 경지정리로 논둑 길도 전과 같지 않고, 일을 대신하는 기계들만 들녘에 가득하니 형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나마 자연의 동무마저 없겠구나 싶다.
그나저나 저수지 둑길에서 풀을 뜯는 송아지를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 그러면 나도 형처럼 쪼그리고 앉아 송아지랑 이야기를 나눠야지. 그렇게 앉아 있노라면 형 생각에 두 눈이 크렁하게 젖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