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깃방깃 꽃불이 피어오르고 있다. 병아리를 닮은 노란 수선화는 그토록 깡깡하던 얼음땅을 뚫고 올라와 펑펑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새순을 내민 일만도 그 아니 장하고 대견한 일인가. 하물며 꽃잎까지 나푼거리다니, 갸륵한 수선화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도 가실 마음이 없다.
토방 아래 고무신이 자꾸 나가자만 그런다. 쥐었던 책을 덮고 뜨락을 내다보니 올벼의 낟알같은 싱싱한 꽃망울이 무장무장 번지고 있다.
빨랫줄에 줄지어 널린 옷은 햇살을 쬐며 물기를 날리고 있고, 바람은 다리짝이 넉신한지 빨랫줄에 앉아 한참 쉬었다 갔다. 저놈들 파삭 마르면 곱게 차려입고 누구네 집에 먼저 놀러 갈까 궁리가 재미졌다. 허나 못자리를 앞두고 봄농사 준비가 한창일 터인데, 놀러 가봤댔자 푸대접이겠지.
내게도 교우님들이 핑핑 놀지마라 맡겨주신 손바닥만한 땅뙈기가 있는데, 씨앗거리라도 흩뿌릴 준비를 마쳐야 옳을 시기다. 그런데 한날 찬미하는 것이 게으름이요, 놀 생각에 푹 젖어 오늘도 딴 궁리가 이 모양이었다.
쓸 글도 많고 쓰란 글도 많고, 할일도 많고 하란 일도 많으나 오늘마냥 융융한 봄날에는 만사 접어두고 봄나들이가 적격이겠다 싶었다. 낮새껏 동네 아짐씨들 입다발총 맞으며 벌집이 된들 어떠하며, 툇마루에 드러누워 책 한 권 낫나게 읽어도 한살매가 오질 것만 같았다.
먼저 차나 한잔 마시자 하고 다기를 꺼내어 씻고 있는데 재 너머 절집의 친구 스님에게서 전화가 반가웠다. 점심때 한번 들르시라는 내용이었다. 멀리서 훌륭한 스심도 와 계시고 대중 울력도 있어 신도분들도 몇 분 오신다 하였다.
이왕 행차에 한 말씀 남길 각오도 하라시는데, 설교를 하라는 것인지 설법을 하라는 것인지는 모르겠고, 마을 사는 예수씨를 절집으로 허물없이 부르시는 붓다씨의 그윽한 초청 앞에 그저 마음겨울 따름이었다.
차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예배당에서 멀지 않은 다리 근처의 논바닥에 차가 한 대 고꾸라져 박혀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몰던 차를 급히 세우고 논바닥으로 뛰어 내려갔다.
어허, 세윤씨의 차였다. 다행히 다친 데 없이 기어나와 헛바퀴만 뱅뱅도는 차 앞에서 한동안 정신 나간 얼굴이었다.
뽀짝 옆이 교각이고 물움벙이라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으니 이만저만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다리를 끼고 있는 농로로 후진을 넣어 다시 반대편 차선을 타고 읍내로 되돌아가려다가 그만 후진이 깊어 굴러떨어진 듯 보였다.
"바빠 죽겄구마는 염병할 노므 차새끼....."
정신이 드는지 죄 없는 차 범퍼를 빵빵 걷어차며 한다는 소리가 그랬다. 차도 새끼를 치는가? 차새끼는 또 뭐람. 그 아버지에 그아들 아니랄까봐 이어지는 욕설이 또한 별것이었다.
세윤씨의 아버지는 이 고을 사람이라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고 마는 현생 '놀보'에 다름아닌 사람이다. 큰아들이 사업이 잘되어 촌부자 소리를 듣게 되자 그 걸진 입에 오만방자까지 보태져서 그야말로 말로는 형용 못할 교만을 다 떨고 다닌다. 급기야는 마을을 벗어나 산 너머에다 아방궁 한 채를 지어놓고 저희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기를 수년째다.
막내아들 세윤씨는 배운 것 없는 막건달로 읍내에다 다방을 하고 있는데 싸가지가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위인이다. 모가지에 석고붕대를 감았나 도대체가 어른들에게 인사라고는 할 줄을 모른다. 것은 고사하고도 아무 데나 푹푹 쑤시고 다니는 그놈의 색대질은 지천에 자식이 깔렸을 것이라는 추잡한 소문까지 흉흉했다.
마침 경운기를 몰고 들녘 나가던 안골 최씨가 논바닥으로 따라 내려왔다. 튼실한 철끈만 하나 있으면 어떻게 차를 올릴 수 있겠다고 그랬다. 나는 교회창고에 있는 철고리줄하고 굵은 동아줄을 꺼내와서 경운기에 차를 묶어보려 하였으나 가망 없는 일이었다. 끌개차를 기다리며 최씨는 세윤씨 차가 올라올 길을 내려고 부지런히 삽질을 했다. 이마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이다.
세윤씨는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쪼그려 앉아 담배 구름이나 만들어내고 있는데, 주객의 전도란 말이 이런 장면에 걸맞는 말이었다.
한참 지나서야 끌개차가 와서 쉽게 차를 끌어냈다. 그런데, 최씨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세윤씨는 끌개차에 훌떡 올라타는 게 아닌가.
"아저씨도 참, 세윤이 저이는 손이 없다요 발이 없다요? 냅둬 불재마는."
"저 자슥 느자구 없는 거야 어제 오늘 안 일이다요? 어려가꼬 생모 잃고 의붓어머이를 두 번씩이나 치른 놈 아니오 저놈이. 그랬으니 월매나 심란허게 컸겄습니까요. 만사 그런갑다 해야재라우."
최씨는 다리 난간으로 시선을 옮기더니만,
"아무튼 세윤이 고 자슥 운수대통한 날이요야. 까딱했으믄 송장 치룰 빤 안 해부렀소. 후제 만나믄 말이여라, 감사헌금 꼭 내락 하시쑈잉?"
흙손을 마저 털며 흐흐흐다.
최씨는 다시 경운기에 올라 들로 향했다. 최씨의 뒷모습으로 펼쳐지는 들녘은 그의 가슴보다 외려 좁아 보였다. 부족한 사람을 안쓰럽게 여길 줄 아는 사람, 저 따순 가슴팍을 가진 사람.
지난 설 지나고 일이었다. 헌 잠바때기나 걸치고 다니던 최씨가 뭔 일인지 번드러지는 양복 차림이었다. 최씨의 팔짱을 꽉 끼고 막내딸 하은이가 붙어 있었다. 하남의 어느 전자제품 공장을 다니는 하은이는 수수한 화장기로도 미모가 물씬 달아올라 있었다. 바야흐로 시집 갈 때가 된 것이다. 그 뒤로 최씨의 부인 덕리댁이 따라 걷고, 처음 보는 사내 하나가 멀뚱거리며 그 뒤를 걷고 있었다.
나는 "빼입으싱께 몰라뵙겄습니다?" 하면서 최씨의 행차에 상관을 걸었다.
"귀헌 손님이 왔는디 집사람이 목포 큰딸네서 인자사 도착을 안했소? 찬도 벨로 없닥하고 장 봐서 상 봐줘야 쓸 손님이 왔는디, 기냥 외식이나 해불자 그라고 나오는 길입니다요. 외식이 이거 얼매만인지 몰르겄구만이라."
바짓속 나락 판 돈을 달아날까 움켜쥐며 최씨의 에두르는 대답이 그랬다.
읍내로 나가실 것인데, 군내버스는 없는 시간이 아닌가. 해남에서 올라오는 차를 타시러 삼거리까지 걸어갈 작정으로 나오신 길이다 싶어 나는 부러 차를 끌고 나왔다.
"타십시오. 제가 모셔다 드릴랑게요."
손님 대접을 해야 쓰겠는지 최씨는 버텅니를 굳게 다물며 별 말이 없었고 낯선 사내는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최씨의 막내딸이 요 사내를 신랑감으로 데려온 것이 분명했다.
며칠 지나 최씨를 만난 김에 사윗감이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그년이 물긴 잘 물었습디다야" 하면서 흡족한 후평이 다행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만났단다.
"손을 만져봉게로 껄껄헌 거시 즈그 각시 굶게 죽이지는 않을 것 같습디다. 그라고 말을 한번 들어봉게로 망상이 없고 솔직헌거시 사람이 되얏구나 싶습디다야. 세뿌닥(혀) 간수만 잘 함사 욕 안 얻어 묵고 잘 살지 않겼어라우? 그라고 고거이 초면에 아부지 그람시롱 무르팍을 탁 꿇는디 기분이 요상해져붑디다야. 찬찬히 눈매를 살패봉게로 선-헌 맴이 보이는 거시, 가사 우리 딸년 속창시 끓이는 일은 않겄다 싶드라고라우."
이것이 사위평의 전부였다.
나는 최씨의 사위 보는 저런 눈, 저 건강한 농민의 눈, 세상의 가난한 것들을 보듬는 저 따순 가슴팍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논흙을 털고 다시 절집으로 차를 몰았다. 일주문근처 비자나무 아래에서 한참이나 기다리셨다는 스님이 꽃얼굴로 맞아주셨다. 대를 엮어 울타리를 세우는 울력에 신도들 십여분이 나선 모양이었다. 멀리 경상도서 스님이 한 분 찾아와 계셨다. 모두들 나를 기다리느라 점심이 늦었다 하니 여간 죄송한 일이 아니었다. 애호박을 송송 썰어 수제비를 삶았는데 국물까지 남김없이 마시고는 선방으로 같이 들었다.
신도님들에게 한 말씀 하라시길래 늦게 오게 된 사정을 섞어 최씨에 대한 그간의 내 마음을 들려 드렸다. 그이의 연민할 줄 아는 마음, 사람을 보는 눈, 그 따순 가슴팍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러한 땅의 사람이야말로 예수요 붓다가 아니겠느냐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산책까지 마치고 절집을 나오는데 스님은 지난 성탄절, 동안거보내느라 못 드렸다며 성탄은 지나갔으니 부활절 헌금이라고 내미시는 것이었다. 스님이 부활절을 어찌 기억하셨을까?
"교회 아-들 과자나 사주이소" 하시면서 손님 스님이 받아 넣으시라고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석탄일도 가까워 온다. 나는 곧 돌려드릴 헌금이라 싶어 사양하다 말았다. 스님들과 신도님들이 오래도록 들어가지 않으시고 손을 흔드셨다. 저들도 최씨처럼 이미 따순 눈, 넉넉한 하늘의 가슴팍을 지닌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시방 나는 따순 가슴을 지닌 따순 사람인가?
하느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시려 찾아오셨듯 나에게 오늘밤 찾아오시어 무얼 줄까 물으신다면, 나는 따순 눈, 세상을 보듬는 저 따순 가슴팍을 주시라고 조르고 싶다.
내가 꼭 갖고 싶은 것, 우리에게 오늘 꼭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