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진리/참꽃 피는 마을·임의진참수필집·이레

봄에는 꽃만 필까

꿈꾸는 섬 2010. 3. 26. 17:36

후룩 후루룩, 라면발 넘어가는 소리가 토방 마루 너머까지 흘러나왔다. 인기척에 놀라 다급히 냄비 뚜껑을 덮는 소리는 그 뒤를 따라 이어져 들려왔다.

 "앗따메 민정이 엄마는 라면 잡수는 소리까정 곱네요이."

무색하겠다 싶어 선수를 먼저 쳐주었다.

 "금방 끼니땐디 뭔 라면이랍니까?"

 "이눔이 하도 먹고 잡다고 노래를 불러쌌길래 한 봉다리 끓인거여라."

 산월에 접어든 아랫배를 가리키며 시치미가 그랬다.

 "송신 나네요. 어서 낳아부러야재, 뱃속서부터 제냥시럽고 까시란 거시 보통 거시기가 아닌갑서라."

 사십에 이르러 아기보를 새로 채운 효순씨는 연신 아랫배를 매만지며 흐뭇한 낯빛을 일렁였다.

 "그그저껜가 그라시대요? 애기 이름을 글씨 지보고 내놓으라 그라십디다."

 "집안에 어른들도 안 계시고 그이나 저나 깜깜한 인간들이라 제가 부탁을 하자고 그랬구만요. 좋은 이름 하나 꼭 맹글어주세요. 아셨재라?"

 "그래도 두 분이 짓재만은 그러셔요..... 것은 그렇다치고, 어디 가셨답니까요? 바쁜 사람을 불러놓고는 안 계시네."

 "오메, 오리집에 가 있겠다고 그러면 오리를 어디서 키우나 마당을 헤맬 터이지만, 저 삼거리 지나 생강밭 너머 재종이 오리탕집을 가리켜 한 말이렷다.

  들어갈 땐 짖지도 않던 개가 따라나오며 으르릉거렸다. 콰간 그냥! 하면서 돌팍을 하나 들었길래 망정이지 두고두고 짖어 댈 기세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저렇다니까, 슬하의 개새끼도 진택씨를 꼭 닮아 물고 늘어지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저번에는 맨 노인네들만 몇 호 기거하는 옆동네 새내골에다가 쓰레기장을 놓는다는 계획이 나돌자 읍사무소다 군청이다 혼자 쫓아다니며 오공본드로 달라붙어 항거한 이가 바로 진택씨였다. 그런 진택씨지만 여자를 후리는 데는 영 맹물이었던 모양인가 늦장가도 보통 늦장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변명을 내놓으라면 딱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서른 두 살 되어서였다던가? 기계로 나락을 훑다가 그만 소매끝이 걸려들어 그날로 영영 잃어버린 왼쪽 팔은 아마도 그를 노총각의 수렁에다 더욱 깊숙이 빠뜨리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마흔 안짝에 다 이르러서야 날개옷을 훔쳐설랑은 선녀를 잡아온 것이 바로 효순씨였다.

  효순씨는 사별한 전남편에게서 민정이를 낳고 올해 사학년인가 오학년인가 올라가게 해 놓고서는 진택씨의 아이를 새로 가졌다. 진택씨는 산모나 아이도 위험하고 또 민정이 있으면 되었지 이나이에 아이를 낳아 뭐 할 거냐며 된고집을 부렸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진택씨를 닦달했다. 진택씨도 늦얻은 아이에 들떠 지내는 모습이 여간 흥에 겨운 눈치가 아니었다.

 

  찬바람에 겁도 없이 머리칼을 감던 소나무야말로 조선의 산천을 지키는 장수감에 틀림없었다. 머리 감을 때 거품만 같은 함박눈을 바람과 햇살에 잘 털어 말리고는 소나무들 저마다 깨끗한 얼굴로 서서 반겨 맞는 첫봄이었다.

  솔밭을 지나니 오리탕집이 저 가까이 보였다.

  "아즉까정은 싸락허구만 두껍개잔 입으시재 그러셨어라우."

  재종이 노모 이집사님이 털 뽑힌 오리 한 마리를 들고 뒤꼍에서 나오시며 염려하시는 말씀이 그랬다.

  재종이하고 진택씨는 안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어가꼬 뫼셨네요. 재종이 엄니께서 그래도 집사님잉께 맨 먼저 교회에다 알려야 쓴다고 그라시기도 하시고요. 먼저 내 술 한잔 받으시고 천천히 재미난 야그를 한번 들어보실랍니까?"

  진택씨는 큼직한 인삼주 병을 옆구리에 차고는 마른 멸치를 안주 삼아 이미 거나해진 상태였다.

  드디어 오리 한 마리가 탕이 되어 올라왔고 나는 혼자서라도 기도를 바쳤다. 그 사이 이미 진택씨 숟가락은 일을 다보고 입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재종이 사장한테 막내 처제를 줘부렀네요."

  "예?"

  "하도 넘봐쌌길래 가져부러라 하고 줘부렀당께요?"

 그러자,

  "성님도 참, 줘부렀단 말씸이 뭔 말씸이라요. 여자가 무슨 물건짝이라요?"

  겸연쩍어진 재종이가 오리 껍질을 씹다 말고 말문을 가로막고 나섰다. 재종이 얘기를 하고 넘어가자.

  고등학교 마치고 십 년 가까이를 원양어선 타고 바다로 떠내려간 재종이가 홀어머니 계시는 고향집에 닻을 내린 것은 저재작년의 일이었다. 장날에 오리 몇 마리 갖다 풀어 놓더니만 나랑 몇마리 진작에 뜯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난 여름에 조립식 건물 한 채 올리고는 밖으로 황토를 이겨 붙여 그럴싸하게 꾸미고 나서 오리탕집이라고 간판을 내걸었다. 한갓진 산골임에도 불구하고 장사가 썩 잘됐다. 인자부텀 사장님이라고 불러주쇼. 만날 때마다 지랄이었다.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재종이는 한참 형뻘이 되는 윗동네 진택씨랑 배짱이 맞아설랑 서로 도와가며 어울렸다.

  언젠가 재종이에게 들은 이야긴데 목수였던 재종이 아버지도 지붕에서 떨어져 그만 한쪽 팔에 철심을 박고서도 사시는 날 동안 그 팔을 잘 놀리지 못했다고 그랬다. 재종이는 진택씨의 없는 한쪽 팔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얽혀 달리 보였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재종이가 오죽이나 잘 보였으면 진택씨가 금쪽같을 막내처제를 글쎄 엮어줬을까.

  이리하여 청춘사업을 시작한 재종이는 경운기라고 대고 부려먹는 써금한 그놈의 봉고차를 하루가 멀다하고 세차를 해댔다. 그러고 보니 오리 냄새만 진동하던 재종이한테서 향긋한 처녀 냄새가 솔솔 이는 것도 같았다.

 "날 풀리믄 맺어줘야 안 쓰겄습니까?"

  진택씨 으름장에 재종이 노모는 "그랄라믄 서둘러야 안 쓰겄소" 하시면서 혼사에는 발걸이를 않겠다는 투의 대꾸였다. 내 잔이 빈 것을 본 집사님은 늙은이 술 한잔 받으시라고 인삼뿌리를 몇 번 저으시더니만 기어 잔을 채워주셨다. 그리고는 성만찬 술빚을 오늘에사 갚게 생겼노라고 환히 웃으셨다.

  "재종이가 뭐가 좋다고 귀한 처제를 엮어주고 그라세요?"

  몸물 좀 비우고 오겠다고 재종이가 뒷간에 간 사이 진택씨에게 물었더니

  "재종이만 허믄 되얏제 안 긍가요? 재종이 퉁건 손을 보고 있노라면 참말로 오지드라고라. 건강허고 일잘허고 거그다가 젊은놈이 사장님 소리까지 들으믄 다 되얏제 안그요? 마음은 말할 것도 없이 곱고 또."

  진택씨는 느닷없이 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나는 내 허벅지만한 재종이 손목을 보면서, 또 항상 잠바때기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진택씨의 의수를 건너 보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피워 물고는 한동안 말을 아꼈다.

  진택씨랑 돌아오는 길은 해가 이미 저물어 있었다. 나는 진택씨의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딱딱한 의수를 만져보았다.

  "이 손도 이상 따땃하네요."

  "우리 마누라쟁이도 못 만지게 하능 거신디 그라시네."

  "애기 이름 말인디, 시방 지어부렀네요."

  "날랍게 지었네? 뭐라 지었는디 얼른 조깐 말씀 좀 해보시쑈."

  "봄날, 봄날은 으짭니까?"

  "봄날이라....."

  "'봄날' 좋지라? 봄이라고 어디 꽃만 돋아나겄어요? 보세요. 인자 이 왼손도 올봄에 돋아날 것잉께요."

  나의 말에 진택씨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거시 또 무슨 해괴한 소리랑가요?"

  "올봄에는 재종이 손도 남의 손이 아니게 생겼고 또 갓난애기 꼼지락 손도 잡아보게 생겼고, 다 이 왼손의 인연으로 돋아나는 새 손들이 아니겠습니까?"

  진택씨는 마을 초입의 다리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헤어질 참에 이르러 악수라고 내미는 오른손이 내 오른손을 비껴가더니만 느닷없는 왼손을 끌어잡고서는 한소리를 던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랑께 이 손도 내 손이다 그 말씀이지라우? 옳소, 그라요."

 

  만물이 소생하고 생동하는 봄이다. 이 새봄에, 진택씨의 왼팔이 새로 돋아나는 이 봄에, 봄날이가 태어나고 재종이가 장가를 들게 생긴 이 봄날에, 산마다 들마다 꽃들이 벙글어 피어나는 이 따순 봄날에, 나는 누구에게 돋아나고 피어 그윽한 꽃이 될 것인가, 이 새봄에 말이다.

  나는 캄캄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촛불 한 자루를 켜고서 무릎을 꿇었다. 교회의 절기상 사순을 걸어 부활을 대망하는 기간이었다. 장작말고는 아무 쓸 데가 없을 비틀어진 대추나무 두 토막을 끌고 와 가로세로 묶어 걸어놓은 십자성상, 그 아래에서 나는, 버려진 것들을 끌어 안으시고 부족한 것들을 마다 채우시고 나누어진 것들을 하나되게 묶으시어 마침내 살리우시는 우리 하느님의 한량없는 은총을 찬미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하느님의 잘린 왼손이 나의 등 언저리를 따뜻이 매만지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효순씨가 낳은 아기의 울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천지 개벽의 소리가 그와 같으리라.

그렇게 봄이 내 가슴까지 와륵 찾아온, 어느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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