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진리/참꽃 피는 마을·임의진참수필집·이레

돋보기 안경

꿈꾸는 섬 2010. 4. 6. 12:04

 

       순서 아짐이 저녁예배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놓고 간

       돋보기 안경

 

       글씨를 모르는 순서 아짐은

       동갑내기 집사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저지난달에 찬송가책을 사고

       지난달에는 성경책도 사고

       얼마 전엔 돋보기까지 샀다

 

        누가 볼까 맨 앞에만 앉는 순서 아짐은

       성경책을 펼 때 찬송가를 펴고

       찬송가를 펼 때 성경책을 펴고

       돋보기 안경을 쓴 채 무조건

       아멘, 아멘 한다

 

  시골 교회라 글을 모르는 분들이 많다. 할머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오십대 젊은 분들 가운데도 몇 분이 그러하시다. 다행히 아라비아 숫자는 깨우쳐 간신히 찬송가를 찾기는 하지만 부를 때는 귀동냥으로 외운것이 전부다. 깜깜 눈인 당사자의 그 애통터지는 심정을 헤아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성서를 찾을 때는 찬송가책을 펴고 찬송가를 찾을 때는 성서를 펴지만, 그래도 절대 손을 가만히 놓고 계시진 않는다. 아, 얼마나 읽고 싶으시겠는가.

  저분은 글을 읽지 못하시는구나 알게 되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된다. 예배중에 성서를 같이 읽을 시간에는 "굳이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려의 한마디를 꼭 붙이고 나서, 천천히 큰 목소리로 본문을 낭독하곤 한다.

  몇 달 전부터 서울 사는 동생의 권유로 교회에 출석하게 된 순서 아짐도 글을 모른다. 그러나 성서를 사고 찬송가책을 사고 아예 돋보기까지 샀다. 사실 자신에게 소용될 물건은 하나도 아니다. 다만 부끄럽지 않으려고 준비한 물건들이다. 누가 알까 싶어 맨 앞에만 앉는 순서 아짐.

  순서 아짐이 글을 모른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데 그만 일통이 터지고야 말았다. 교회일로 모두 주소며 뭐며 서명할 일이 있었는데 순서 아짐은 몇 분 할머니들과 함께 그냥 밖으로 나가려 하셨다. 그러자 박집사님이 순서 아짐을 붙잡고는 기어 서명하고 가라며 졸랐다.

  순서 아짐은 "나는 안 한당게?" 얼굴을 붉히더니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급히 교회를 떠나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순서 아짐은 교회에 더 이상 나오지 않으셨다.

  엊그제 하늘날, 예배를 드리기 앞서 모두 성서와 찬송을 덮자고 말씀드렸다. 배운 게 없고 아는 게 없어서 어디를 가도 무시받는 사람들이 우리 남녘교회에 와서만이라도 대접을 받아야지 않겠느냐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성경책도 찬송가도 없이 예배를 드리겠다 했다. 그리고 여는 찬송으로 애국가 1절을 불렀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성서는 내가 대독했다. 닫는 찬송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그날 예배 마치고 나는, 박집사님을 따로 불렀다. 순서 아짐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는지 박집사님도 짐작하고 계셨지만, 어떻게 일을 풀어야 할지 난감해하셨다.

  "제가 큰 죄를 지었구먼요."

  눈물까지 글썽이셨다.

  "무슨 말씀이세요. 집사님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공동식사 마치고 교우들 돌아가느 그 길에 나는 박집사님이랑 같이 순서 아짐댁을 찾았다. 마침 순서 아짐은 집에 계셨다. 나는 순서 아짐의 토라진 마음을 쓸어주려고 예수님이 얼마나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공경하셨는지 조목조목 말씀드렸다. 박집사님은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순서 아짐 손을 잡고 내내 놓지 않으셨다.

 

  다시 순서 아짐이 교회에 보인다. 이제는 맨 앞에만 앉지 않으신다. 그러나 여전히 성서와 찬송을 찾을 때 다른 분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 휭~ 주위를 둘러보며 돋보기 안경을 가방에서 꺼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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